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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7

프로그래밍 러스트

프로그래밍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 https://www.petanet.net/2022/12/blog-post.html ) 러스트 공식 가이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프로그래밍 러스트'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저는 프로그래밍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어서 자세하게 기술한 책이 좋습니다. 이천 페이지를 넘기는 두꺼운 책을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두껍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어느 정도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일부 내용이 자세하지 않습니다. C언어를 몰랐다면 포인터와 관련한 부분에서 잠시 헤맸을 것 같고 CPP를 알았다면 더 쉽게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인 난이도는 제가 읽어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단 일부 예제는 머리를 많이 굴려야 했습니다.

러스트 공식 가이드를 읽을 때는 러스트가 신선하지만 개미 지옥 같았습니다. 장점이 매우 커서 가능성이 커 보이기는 하는데 사용하기가 지나치게 번거롭고 까다롭다고 말해야 하려나요. 이 책을 읽고 나니 체계가 잘 잡힌 합리적인 언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러스트의 첫 고비라는 소유권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나름 자만심을 가지고 있던 찰나에 참조가 등장합니다. 러스트는 각종 포인터 사용이 강제되는 언어인데 여기에는 수명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코드를 잘 작성한 것 같은데 컴파일러가 계속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필경에는 컴파일러가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은 러스트를 익힐 때 난감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보니 조금은 고통을 덜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꽤 많아서 다 읽고 나니 앞 부분은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파이썬의 'Hello World!'를 어떻게 작성하는 것인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 기억력이라서요. 내용이 알차서 두어번 더 읽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2022-12-28

프로그래밍 관련한 책을 보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코딩에 대한 신문기사를 종종 읽습니다. 앞으로 정규 교육 과정에도 포함시킬 듯 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055749.html ) 코딩은 꽤 오래 전에 HTML을 익힌다고 간단한 자바 스크립트를 사용해 본 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에 그동안 공부한 것들도 코딩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아는 것이 없다 보니 프로그래밍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원하는 수준은 고급적인 지식은 바라지 않고 대강만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코딩에 입문할 때 파이썬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파이썬의 다음 단계로 C를 접한 후에 심화 과정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녁에 시간이 있을 때마다 볼 생각으로 책을 구입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책은 이렇습니다.
가장 왼쪽의 책은 "처음 시작하는 파이썬"( https://books.google.co.kr/books?id=4Rr6DwAAQBAJ&lpg=PP1&hl=ko&pg=PP1#v=onepage&q&f=false )입니다. 뱀을 굉장히 싫어하는 가족이 있어서 표지를 떼어냈습니다.

읽은 순서는 "처음 시작하는 파이썬", "C 기초 플러스", "러스트 프로그래밍 공식 가이드" 순입니다. 프로그래밍 입문으로 파이썬은 클래스까지만 접하면 된다는 글을 보고 처음 시작하는 파이썬은 중간 정도까지만 읽었습니다. 최근에 Go하고 러스트가 주목 받는 것 같아서 러스트와 관련한 책도 넣었습니다. 평가 받아야 하는 공부가 아니고, 돈을 벌려고 일부러 하는 직업도 아니고, 머리 빠지게 어렵지 않은 입문 수준이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C와 파이썬은 유사한 점이 꽤 많았습니다. 둘 중 하나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나머지 하나도 책을 읽는 것이 많이 수월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입문을 파이썬 보다는 C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C의 장점은 단순하고 빠르다는 점인데, 단순함 때문에 함정이 굉장히 많습니다. 함정에 계속 빠지면서 삽질하다 보니 코딩 특유의 논리의 흐름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시행착오가 개념을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디버거로 변수의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머릿속의 직관과 실제 코드의 흐름의 차이를 가시화 하기 좋았습니다. 파이썬으로 동일한 경험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C가 단순하다 보니 초심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의 흐름이 더 직접적으로 보였습니다.

러스트는 온갖 좋은 수식어가 다 붙어 있고 틀린 말이 아닙니다. 러스트 코드는 보기에는 C나 파이썬보다 지저분한데 읽기는 오히려 쉽습니다. 실수한 부분이 잘 보이고 여기에 더해서 컴파일러가 지적을 잘 해줍니다. 러스트의 트레이트와 메서드는 파이썬의 클래스보다 인간의 사고 방식과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초기 난이도가 꽤 높습니다. C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러스트를 접했다면 참조가 등장할 쯤에서 책을 던졌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이든 초기 지식이 필요합니다. 초기 지식을 익히는 과정은 난이도를 떠나서 답답합니다.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해의 연쇄가 이뤄져야 하는데 처음에는 우로보로스처럼 A를 이해하려면 B가 필요하고, B를 이해하려면 A가 필요합니다. 초기 지식을 익힌 이후의 과정은 난이도의 측면에서는 더 어려워지지만 요구 지식의 피드백이 사라지니 답답하지는 않습니다. 파이썬은 문턱을 크게 낮춰서 차근차근 접하면 되고 C는 포인터에 들어서면 답답함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러스트는 이 과정이 너무 깁니다.

그냥 호기심에 시작한 독서인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PC를 사용하면서 봤던 것들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오랜만에 느리게라도 머리를 굴리니 신선한 자극이 됐습니다.

2011-03-12

오랜만에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근 몇년동안 학업을 제외한 책은 거의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고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분기에 책한권은 꼭 읽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약간은 시간적으로만(.....)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게 되니 게을러진 모양입니다. 마음을 잡고 책을 구입해서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사실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정신적인 충격입니다. 최근에 손에 들게 된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 '풀하우스', '조상 이야기',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대멸종', '부분과 전체'입니다. 한권을 제외하면 모두 진화론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된 내용의 책들입니다. 얼마전 다윈 탄생 200주년이라고 떠들썩 했습니다. 거기에 최근 분자생물학 쪽의 연구결과가 계속해서 발표되면서 한동안 잠잠해졌던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갈등이 좀더 재미있는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내가 읽은 책은 꼭 내 책장이 꽃혀 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 때문에, 집에서 5분 거리의 도서관에 읽으려고 하는 책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굳이 돈 내고 구입했습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다시 읽는 경우도 많지는 않은데, 그냥 책장을 보면서 흐뭇한....;;;

그동안 진화론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많은 부분이 정말로 '피상적' 이었다는 것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가해진 충격이 상당히 컸습니다. 요즘 정말 외부 상황과 관련없이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기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폭풍이 머리속을 휘젓고 지나간 느낌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2011-01-24

진화론과 창조론.....

얼마전 화두가 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진화론에 대한 책을 몇권 읽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창조론을 교과 과정에 넣으려 했던 주에 대해서 위헌 판결이 내려진 적이 있기도 하고, 다른 국가에서도 여러가지 목적으로 학교 정식 교과 과정에 창조론에 대한 부분을 넣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은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은 자연 현상과 거리가 먼 사회 현상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둘간의 논쟁을 보고 있으면 미묘하게 방향이 달라 보입니다. 서로 같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니 결국 논쟁만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탐구과정을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발견한 것들에 공통된 규칙을 찾습니다. 어떠한 규칙을 발견하게 되면 이를 정교화시키는 동시에 적용 영역을 확장시킵니다. 실험을 통해서 기존의 이론에 맞는지 살펴보고, 현상과 규칙이 맞지 않는 다면 규칙을 정교화 시키거나 새로운 가설을 도입합니다. 계속해서 이론의 예상범위를 벗어난다면 극한까지 규칙을 정교화하거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규칙을 구상합니다.

진화론 역시 과학의 학설중 하나이고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부정할 수 있는 반론이 등장한다면, 그들이 취할 행동을 예상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진화론을 정교화하고 적용 범위를 넓혀보고, 이래도 안된다면 새로운 가설을 도입하고, 이것도 안되다면 결국 새로운 규칙을 구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창조론은 많은 부분이 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최소한 그들도 자신들의 이론이 과학적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론 역시 동일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이런 이유로 진화론은 옳다.' 반면에 창조론의 주장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진화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이유로 진화론은 옳지 못하다.'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사실을 밝히는 방법중 하나는 다른 모든 가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신의 가설만이 옳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창조론이 옳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습니다.

진화론의 부정이 창조론이 될까요? 만약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 하나가 진화론의 오류를 기존의 규칙 체제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규칙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창조론이라고 완전하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만약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규칙의 정교화 내지는 새로운 가설의 도입으로 효율적으로 설명하게 된다면?

둘 모두 같은 현상을 가지고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과학은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지식의 체계입니다.(참조 : http://ko.wikipedia.org/wiki/%EA%B3%BC%ED%95%99 ) 창조론이 과학이라면 그들 역시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자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창조 과정에 대해서도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지식 체계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자신의 이론을 적절한 방법으로 검증할 수 없지만, 상대방을 무한히 비판한다면... 서로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평행선이 무한히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2010-05-14

갑자기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생각이....

얼마전 고등학생 한명이 동물농장에 대한 글을 프린트하는 것을 봤습니다. 저도 고교 시절에 모대학의 논술 문제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열심히 줄거리만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물농장에는 나폴레옹이라는 돼지가 등장합니다. '1984년'에서 줄리아가 내부 당원에 대해서 돼지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고, 돼지는 일반적인 우리의 인식에도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동물은 아닙니다. 부정적인 인물에 대해서 좋지 못한 이미지의 동물에 빗대는 것은 서양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상당히 정치적인 술수에 능한 돼지입니다. 풍차 건설 계획을 열렬히 반대하다가 나중의 원래 자신의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등 나폴레옹은 여러 모순되거나 동물주의에 위배된 행동또는 말을 하지만 몇가지 수단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하기까지 합니다.

언변이 매우 뛰어난 스퀼러라는 돼지도 등장합니다. 나폴레옹의 말이나 행동에 모순이나 오류가 있을 때 이를 합리화 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돼지의 말이면 대부분 다른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뭔가 잘못된 점이 있음에도 수긍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제스쳐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호감을 느끼게 하는 외모에 더해서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말솜씨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에는 충성스럽지만 다른 동물들에게는 상당히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는 9마리의 개가 있습니다. 이들의 무력으로 스노볼을 동물동장에서 축출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동물들을 숙청하기도 했습니다. 스퀄러의 언변이 나폴레옹을 비추는 조명이라면 개들의 힘은 나폴레옹을 뒷받침하는 배경막입니다. 스퀼러나 납득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개들은 반대하거나 반항하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일을 합니다.

별 생각없어 보이는 양들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알려준대로 고함을 질러서 동물들 간에 여러가지 일에 대한 논의나 불만을 중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의 고함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작용합니다. 양들의 고함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동물들의 주위를 분산시키는 동시에 반대의견을 막고 나폴레옹이나 스퀼러가 빠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도 시끄러운 고함이 다른 소리를 묻어버리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처럼 보이는 효과까지 있습니다.

나폴레옹 일당은 뭔가 불리한 일이 있으면 존즈가 돌아올 수도 있다며 동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농장내의 나쁜 일들은 모조리 축출당한 스노볼의 탓으로 돌립니다. 스노볼이 적대적인 이웃 농장의 주인과 짜고 동물농장에 숨어들어서 여러가지 해악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지도 덕분에 동물농장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지만 동물들은 알아볼 방법도 없고 삶이 좀더 편안해진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두서없이 글을 썼습니다. 나중에 혹시 시간이 있으면 다시 한번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다시 읽어 봐야 겠습니다. '동물농장'은 공산주의의 타락을 비판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도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2009-01-27

애플의 1984년 광고


인터넷을 서핑하다보니 애플에서 이런 광고를 했었군요. 예전에 제가 kkoyee.com에 올리기도 한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1984년'이란 소설은 엄청난 명작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한번 읽어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요즘 인터넷이 무척 시끄럽습니다. 어떤 사건인지는 제가 굳이 이야기 안해도 다들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이전에 글을 올리기를 '1984년'의 세계는 사실상 불가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조차도 대다수의 정보는 소수가 생산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생명줄 중 하나는 바로 하고 싶은말을 자유롭게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1984년'의 통제의 큰 축중 하나는 바로 개인의 사상까지 모두 한목소리를 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소리는 '1984년'의 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하나의 거대한 장이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극복해야 할 점이지 인터넷에서의 자유로운 분위기 자체를 배제해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물론 허위사실 유포네 하는 부분은 알수 없지만, 우선 허위사실 유포가 맞다고 하더라도 과연 형평성에 맞는 법적용인지도 의문입니다. 저작권에 이은 또다른 폭풍이 인터넷에 몰려오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07-12-09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습니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무척 큰 인상을 받은 나머지 '농물농장'까지 읽고 말았습니다. 수년전 논술과 면접을 준비하면서, 서울대 논술문제에 동물농장이 언급됐다는 이유로 대충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색다릅니다.

'1984년'은 읽고 책장을 넘길때마다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든 무엇인가가 있었던 반면에 읽으면서 화나고 짜증나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윈스턴이 처절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지 오웰의 '1984년'의 세계관에 어떻게든 타격을 가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짜내서 글 하나를 올렸지만, 솔직히 말하면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괴상한 모습의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물농장'도 '1984년'과 비슷한 느낌의 소설입니다. 한가지 체제(아마도 사회주의)가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 '1984'년은 변질이 극도에 이른 사회에서 한개인의 파멸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동물농장'은 변질되어 가는 모습 그 자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1984년'에 비해서 분량이 적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도 반나절정도 걸릴 듯 합니다.

아마도 '동물농장'(이제부터 인용부호 생략하겠습니다. 귀차니즘의 압박이라고 해야하나요?)의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특정 인물을 우화화 한 것처럼 보입니다. 존즈, 나폴레옹, 메이저, 스노볼 등의 등장인물(동물?)은 잘 살펴보면 하나하나에 연상되는 인물 있고, 두번의 전투 또한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상황과 어느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벗어난 시점에 제가 있어서 그런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물농장'은 소련 사회주의의 변질을 비판한 소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데올로기 논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전혀 의미가 없는 소설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민주주의에서도 이러한 위험이 상존해 있습니다. '1984년'또는 '동물농장'의 디스토피아는 민주주의조차도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1984년과 동물농장에서 사람(동물)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바로 정보의 조작과 통제, 그리고 적의 설정과 적에 대한 공포를 이용했습니다. 정보의 조작과 통제, 그리고 적의 설정과 공포감의 조성이 지금의 사회에서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일부 매체의 거대화, 정부 또는 거대 기업집단이 인터넷과 매체를 장악하려고 하는 모습과 기술의 발달 모습을 보면 오히려 위험성이 증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인터넷을 보면 불과 수년전의 자유로운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국가 안보 또는 사회 안전이란 미명하에 통제가 점점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통제의 필요성은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회가 거대화되고 고도화되면서 이러한 것이 필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언제 칼날을 돌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통제가 과연 정말 사회를 위한 것인지 일부 특권층을 위한 것인지 이미 너무 거대화한 사회에서 전체를 조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오히려 통제하는 측으로부터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세한 문제상황, 전문적인 지식, 통계자료, 정보를 알릴 수 있는 매체등의 측면에서 통제하는 측이 우위에 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어떠한 정보 또는 불합리성에 대한 확신이 있더라도 상대방의 여론, 법, 그리고 회유를 통한 공격을 벼텨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적을 설정해서 사회의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충분히 보셨을 것 같습니다. 집단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것도 힘들다면 어떤 사람 또는 집단을 희생물로 삼아서 내부 또는 외부의 적을 만듭니다. 이들의 위협이 우리의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필요 이상의 통제를 합리화시킵니다. 정보가 통제되어 있으니 쉽게 적을 만들고 또한 적이 위협하고 있으니 정보를 쉽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비극적인 결과는 동물농장의 한 부분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2007-08-11

조지오웰의 '1984'를 읽고

얼마전부터 읽는 책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대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소설을 거의 읽기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넘겨버렸지만 결국 시간을 내서 읽었습니다. 어느정도 이곳저곳을 통해서 대충의 줄거리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읽어보고 나니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시대는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이렇게 세 국가로 통합됩니다. 세 국가는 모두 극단적이고도 참혹한 전체주의국가입니다. 당은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은 증오, 감시, 그리고 사실 왜곡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국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고독한 철저하게 부품화된 인간만에 존재할 뿐입니다. 소설의 무대인 오세아니아에서는 세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상계급인 내부당원, 중간계급인 외부당원, 그리고 최하층을 이루고 있는 노동자입니다. 과거의 전체주의 체계가 그랬듯이 최상층은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하위계층을 철저하게 억압합니다.(특히 중간계급인 외부당원에 대한 억압이 강력합니다.)

자신의 가족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는 텔레스크린,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잠꼬대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항상 사실에 대한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사실 또한 왜곡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알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국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당에 저항하는 인물은 갑자기 사라져서 세뇌되고, 다시 나타났다가 결국 제거해버립니다. 항상 다른 국가와 동맹과 반목을 반복하며 전쟁함으로써 외부의 적을, '골드스타인'이란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에 대한 증오는 '증오의 시간'을 통해서 더욱 증폭시킵니다.

빅브라더(Big Brother)라는 인물은 당 즉 국가의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친밀감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빅브라더는 당의 영원한 환영에 불과합니다.

개인에 대한 통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특별한 법은 존재하지 않으나 당이 암묵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당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집니다. 자신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 국가는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며 전쟁을 쉬지않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잉여 생산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체제의 근반이 되는 계급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결말입니다. 대부분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비록 미래가 디스토피아로 그려졌다고 하더라도 더 밝은 나중의 미래를 위한 무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웅이 제거되더라도 자신의 마지막 부분, 인간다움이라든지 신념, 밝은 미래를 위한 복선은 남겨두고 사라져갑니다. 하지만 이소설에서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인 윈스턴은 결국 자신의 정신이 당의 세뇌와 회유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됩니다. 결국 죽음의 순간조차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영원한 패배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1949년 출판되었습니다.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가 수년전까지만 해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고 소련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사회주의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르크스의 본래 공산주의의 이상을 잊고 날뛰고 있었으니 전체주의와 다르게 볼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글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이상향의 한 모델중 하나를 절대화해서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컴퓨터와 그에 따르는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고 국가가 이 영역을 침범하려 하면서 '1984년'의 빅브라더(Big Brother)가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이것에 제가 책을 읽게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네트워크 기술은 도리어 빅브라더의 출현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유무선 환경은 정부 또는 정권의 핵심영역에서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순식간에 전파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터넷 또는 네트워크에 대해서 국가 또는 다른 권력기구가 불필요한 부분을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인터넷과 여러 네트워크는 사실의 왜곡을 과거보다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물론 아직도 사실왜곡의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내에서는 전체주의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견은 아직도 무시되기 십상이고 심지어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1984년'에서도 다른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서 외부의 적을, '골드스타인'이란 인물을 설정함으로서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1984년'식의 전체주의가 실질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전체주의, 민족주의에 의한 전체주의, 또는 중우주의에 빠질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심각한 수준의 국수주의, 민족주의를 보면 가끔씩 겁이 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배웁니다. 소설에서는 과거의 전체주의의 실수를 통해서 더 극단적이고 억압적인 빈틈없는 전체주의를 완성하지만, 오히려 현실에서는 전체주의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순간적인 감정에도 세뇌에도 빠질 수 있지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류의 역사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새로운 것은 새로운 문제점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어느 누구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1984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ko.wikipedia.org/wiki/1984%EB%85%84_%28%EC%86%8C%EC%84%A4%29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