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1

조지오웰의 '1984'를 읽고

얼마전부터 읽는 책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대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소설을 거의 읽기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넘겨버렸지만 결국 시간을 내서 읽었습니다. 어느정도 이곳저곳을 통해서 대충의 줄거리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읽어보고 나니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시대는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이렇게 세 국가로 통합됩니다. 세 국가는 모두 극단적이고도 참혹한 전체주의국가입니다. 당은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은 증오, 감시, 그리고 사실 왜곡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국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고독한 철저하게 부품화된 인간만에 존재할 뿐입니다. 소설의 무대인 오세아니아에서는 세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상계급인 내부당원, 중간계급인 외부당원, 그리고 최하층을 이루고 있는 노동자입니다. 과거의 전체주의 체계가 그랬듯이 최상층은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하위계층을 철저하게 억압합니다.(특히 중간계급인 외부당원에 대한 억압이 강력합니다.)

자신의 가족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는 텔레스크린,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잠꼬대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항상 사실에 대한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사실 또한 왜곡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알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국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당에 저항하는 인물은 갑자기 사라져서 세뇌되고, 다시 나타났다가 결국 제거해버립니다. 항상 다른 국가와 동맹과 반목을 반복하며 전쟁함으로써 외부의 적을, '골드스타인'이란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에 대한 증오는 '증오의 시간'을 통해서 더욱 증폭시킵니다.

빅브라더(Big Brother)라는 인물은 당 즉 국가의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친밀감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빅브라더는 당의 영원한 환영에 불과합니다.

개인에 대한 통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특별한 법은 존재하지 않으나 당이 암묵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당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집니다. 자신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 국가는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며 전쟁을 쉬지않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잉여 생산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체제의 근반이 되는 계급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결말입니다. 대부분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비록 미래가 디스토피아로 그려졌다고 하더라도 더 밝은 나중의 미래를 위한 무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웅이 제거되더라도 자신의 마지막 부분, 인간다움이라든지 신념, 밝은 미래를 위한 복선은 남겨두고 사라져갑니다. 하지만 이소설에서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인 윈스턴은 결국 자신의 정신이 당의 세뇌와 회유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됩니다. 결국 죽음의 순간조차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영원한 패배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1949년 출판되었습니다.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가 수년전까지만 해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고 소련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사회주의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르크스의 본래 공산주의의 이상을 잊고 날뛰고 있었으니 전체주의와 다르게 볼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글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이상향의 한 모델중 하나를 절대화해서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컴퓨터와 그에 따르는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고 국가가 이 영역을 침범하려 하면서 '1984년'의 빅브라더(Big Brother)가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이것에 제가 책을 읽게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네트워크 기술은 도리어 빅브라더의 출현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유무선 환경은 정부 또는 정권의 핵심영역에서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순식간에 전파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터넷 또는 네트워크에 대해서 국가 또는 다른 권력기구가 불필요한 부분을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인터넷과 여러 네트워크는 사실의 왜곡을 과거보다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물론 아직도 사실왜곡의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내에서는 전체주의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견은 아직도 무시되기 십상이고 심지어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1984년'에서도 다른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서 외부의 적을, '골드스타인'이란 인물을 설정함으로서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1984년'식의 전체주의가 실질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전체주의, 민족주의에 의한 전체주의, 또는 중우주의에 빠질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심각한 수준의 국수주의, 민족주의를 보면 가끔씩 겁이 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배웁니다. 소설에서는 과거의 전체주의의 실수를 통해서 더 극단적이고 억압적인 빈틈없는 전체주의를 완성하지만, 오히려 현실에서는 전체주의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순간적인 감정에도 세뇌에도 빠질 수 있지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류의 역사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새로운 것은 새로운 문제점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어느 누구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1984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ko.wikipedia.org/wiki/1984%EB%85%84_%28%EC%86%8C%EC%84%A4%29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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